존 컴퍼니(1판) 리뷰

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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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3-15 오전 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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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왜 이 타이밍에 철 지난 이 게임을?

최근 바이마르 후기를 남긴 후에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묘하게 머리를 떠도는 잡념이 생겼다. 아, 맞다. 나 보드게임 참 좋아했었지, 2박 3일 간 아지트에 모여 먹고 자고 보드게임만 한 적도 있었더랬지. 몇년 간 보드게임과의 연은 흐려졌지만 깊숙한 곳에 남아있던 세포가 다시 일어나는 느낌. 언제 즐겨도 기분 좋은 이 느낌을 곱씹어 보면, 아마도 내게 없던 보드게임 세포가 생겨나는 건 아닐 게다. 그래, 나는 태생적으로 보드게임을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꽤 큰 여운이 가시기 전에 무언가 하나 더 남겨야 할 것 같다는 사명도 절반 쯤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즐겼던 게임에서 피어오르는 익숙한 향이 아마 이것과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문득 한 번 쯤 남기고 싶다고 여겨진 그 게임의 기억을 짚어본다.

1. 나는 왜 보드게임을 좋아하는가

일전에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게임을 좋아하는 건 분명 나의 기본 속성이다. 그런데 나는 왜 보드게임에 더 마음이 가게 되었는가. 평소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보드게임을 알려준다 한들, 그가 느끼는 보드게임의 재미나 흥미도는 천차만별일 것이다. 가령 파티게임을 재미있게 즐긴 후, 뒤돌면 그런 게 있었는지도 모를 누군가도 있을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흥미도 있고, 뭔가 다른 거 없어? 하면서도 꽤나 수동적인 자세로 없으면 말고를 외칠 수도 있겠다. 또 다른 누군가는 조금씩 더 어려운 게임에 흥미를 가질 수도 있다. 심지어 나처럼 다른 보드게임을 찾아 이런 게임을 하면 더욱 즐겁겠다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보드게임의 매력을 느끼게 되었는가. 처음엔 컴포넌트를 펼쳐놓고 즐기는 아날로그적 감성이 한 몫 차지했을 것이다. 넓은 보드에서 직접 기물을 옮기며, 손에 쥐는 동전에 만족을 느끼기도 한다. 그게 비록 게임판일 지언정 실물을 바라보면 마치 내가 정말 그 현장의 무언가가 된 것 처럼 느껴지는 그 오묘함이 있었다. 또한 흔히 즐기는 컴퓨터게임에서 느낄 수 없는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 즉각적인 반응성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나의 행동으로 다른 사람이 감탄하거나 곤란을 겪는 모습, 반대로 나 또한 누군가의 일격에 계획이 일그러지며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하나 싶은, 위기의 상황에서 발버둥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후 넓은 보드를 내려다보는 그림을 연출 할 수도 있다.

아! 나는 테마가 살아있고 모두와 교감할 수 있는 보드게임을 좋아하는구나.

최근 즐겼던 바이마르가 약간 그랬다. 쿠데타!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이를 마음 속으로 외치며 주사위를 굴리던 모습이 아직 생생하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앞날을 쥐고 싶어하는 누군가가 된 듯한 기분, 그리고 나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다른 사람들의 모습. 이 즐거운 놀이가 끝난 뒤 문득 다른 게임이 떠올랐다. 한때 나의 취향을 저격하였던 게임, 바로 존 컴퍼니였다.

2. 존 컴퍼니

존 컴퍼니는 우리에게 생소한, 하지만 그 아픈 이면을 다른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는 동인도회사 내에서 벌어지는 여러 일들을 그린 게임이다. 이 주식회사는 룰에 따라 주주와 경영진이 분리되어 각자의 소임을 다하며 움직인다.

각 플레이어는 하나의 패밀리(가문)을 맡아 플레이한다. 패밀리 간에는 약간의 특성이 있는데, 게임을 좌우할 정도로 큰 격차가 있지는 않다. 물론 성향에 따라 약간 갈리기는 하겠다만은. 사실 이 게임은 가문이 무엇이냐 보다 초기 인원 배치가 더욱 중요하다고 본다. 각 가문은 해당 회사의 직책에 구성원을 앉히며 세팅한다. 물론 이 세팅에는 주사위의 가호가 필요하다. 부디 요직에 앉기를.

-대략적인 게임 보드-

이 게임의 진짜 중요한 액기스는 저 중앙보드, 동인도회사의 구조에서 나온다. 붉은 라인을 따라 컨베이어벨트 타듯 회사가 운영 되는데, 각 지점마다는 부서장이 존재하고, 각자 고유한 임무를 맡고 있다.

그 중에 꽃은 체어맨과 무역관리자. 이 게임에서 핵심 요직은 그 둘이다. 체어맨은 임원의 인사권과 예산 배분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체어맨에 자신의 가문 일원이 앉게 되면 자신의 가문에 유리하도록 특정 부서에 예산을 나누어 줄 수 있다. 한편 무역관리자는 말 그대로 회사에서 생산한 상품과 선박을 어느 지역으로 보낼 것인지 분배하는 업무를 맡는다. 이 또한 자신의 가문에 유리하도록 자원을 분배하는 것은 당연지사.

그렇다면 해당 요직을 꿰차지 않은 다른 가문은 그저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하는가? 그건 아니다. 이 게임은 정치행위가 가능하다. 상대에게 뇌물도 줄 수 있고, 담보도 맡길 수 있다. 각 플레이어는 이러한 행위를 적극적으로 수행하며 바람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끌고 와야 한다.

한편 이 외에도 중요한 책무를 맡은 직책이 있다. 이 회사의 캐시카우를 맡기도 하는 각 관구장이다. 이 당시 동인도회사는 인도와 무역을 벌이는 회사의 생리 때문에, 각 무역루트마다 관구장이라는 직책을 두기도 했다. 쉽게 말하면 지역을 관할하는 총독과도 비슷하다 볼 수 있다. 관구장은 해당 지역을 책임지며 수익을 관리하고 회사에 분배하는 역할을 맡는다.

여기서 재미있는 상상을 해보자. 만일 체어맨과 관구장이 각기 다른 가문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떨까? 이 때 체어맨은 딜레마에 빠진다. 이 회사에 큰 수익을 가져다 주는 저 관구에 예산을 배정하면, 다른 사람의 배가 부르게 된다. 하지만 이를 거부하자니 회사가 파산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하는가. 물론 이러한 딜레마는 관구장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나에게 예산을 많이 끌어오게 하려면 체어맨 가문에 뇌물을 주고 청탁해야 하나!? 그렇다. 관구장과 체어맨, 무역관리자가 각각 다른 사람일 때, 정치가 비로소 시작된다.

-꽤 많이 쌓인 주식(가운데 큐브)-

이 회사를 굳이 현대 기업체에 비유하자면, 체어맨은 조직 및 예산 총괄, 무역관리자는 로지스틱스, 관구장은 세일즈에 비유할 수 있다. 그래서 사내 갈등 상황이 꽤 신랄하게 벌어지기도 한다. 우리 부서에 더 많은 예산을 확보해야한다거나, 어디 누군가가 교체되기를 바라거나.

이런 협잡이 발생한 후에는 영국 및 인도의 상황에 맞는 사건 또는 법률안 상정이 발생하기도 한다. 법률의 가부결을 정할 수 있는 투표행위와 더불어 인도 내에서의 이합집산이 무작위로 일어나다보면, 이 회사는 바람 잘 날이 없구나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이 게임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점은 회사의 구성원들에게 확률적으로 은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먼저 해당 직위에서 영향력이 사라진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겨우 체어맨이 된지 한 라운드만에 은퇴를 당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견딜 수 없는 허무함에 몸서리 치게 된다.

한편 이렇게 은퇴한 구성원은 게임 세팅 중 무작위로 뽑힌 보상칸 중 하나로 이동하게 되는데, 이 카드에는 각각 은퇴 후 구성원이 갖게 될 직업이 적혀있다. 가령 그는 교수가 될 수도 있고, 언론인이 될 수도 있다. 결혼을 하거나 사교계의 거물이 될 수도 있다. 이렇듯 각 카드에는 여러 직업이 있고, 그 직업을 들어가려면 어느 정도의 경력(임원이었는지)과 금전이 필요하다. 하지만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에게는 그 이름이나 직책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바로 해당 칸에 승점이 적혀있기 때문이다. 그 의미를 바꾸어 말하면 이 게임의 주요 승점 루트는 바로 은퇴한 구성원이 갖는 직업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적절한 시기의 은퇴는 이 게임을 승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이 게임은 대중무역이 열리는 시기, 회사의 독점적 위치에서 벗어나 가문이 운영하는 회사의 등장 등 여러가지 시나리오 따라 다양한 변화가 일어난다. 또한 1인 플레이를 위한 시나리오와 별개의 보드(뒷면)도 제공된다. 이외에도 시나리오에 따라 몇 라운드까지 진행되는지 미리 정할 수 있으며, 시대적 배경에 의한 인도의 상황까지 결정되는데, 기본게임인 6라운드만 해도 4시간은 지날테니 쉽사리 긴 캠페인을 먼저 진행하기 보다는 기본게임을 위주로 플레이하는 것이 괜찮다고 생각한다.

3. 그래서 무슨 재미야?

앞선 설명을 바탕으로 이야기 하자면, 이 게임은 회사라는 빵바구니에 담긴 빵을 누가 얼마나 가져가는지, 이를 바탕으로 얼마나 많은 승점을 얻는지로 인해 승부가 판가름 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많은 이들이 필요 이상의 욕심을 내다가는 회사에 경영난이 생기게 된다. 만일 회사가 빚더미에 앉거나 경영불능 상태에 빠지게 되면 현재 경영진에게 패널티가 생기니 반드시 유의 해야 한다.

-빚더미(검은 디스크)에 앉은 회사-

그러므로 이 게임 또한 아슬아슬한 다인 줄타기의 범주에서 이득을 챙겨야 한다. 실례로 몇 번 게임을 즐기며 한 번은 회사가 엄청나게 부유했던 적이 있었고, 한 번은 너무나도 가난해서 파산 직전까지 간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런 상황은 누군가의 욕심 때문일 수도 있지만, 불가항력 혹은 관구의 판매가 영 시원치 않아서 일어나는 일일 수도 있다. 이러한 가변조건 하에서 각 플레이어는 영달을 취해야 하는 한편, 어떤 순간에는 회사의 회생을 위해 모두 합심해야하는 상황 또한 시시각각 발생한다.

그렇다. 이 게임은 회사 울타리 내에서의 플레이어 간 협상과 이익의 줄타기가 핵심이다. 그래서 이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정말 재미있는 역할 놀이가 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상황이 익숙하지 않거나 운이 나를 돌아봐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가득 찬 사람이라면 충분히 괴로워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 게임은 주사위에 회사의 흥망을 걸어야 할 상황이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사운을 걸고 인도행 배를 띄웠는데 좌초된다든지, 인도 부족 간 내전으로 영토가 찢어지거나 폐허가 된다든지, 혹은 어떤 부족이 관구에서 이탈하여 자신들만의 제국을 세운다든지 하는 회사측의 재해는 모두 주사위로 결정되는데, 이러한 불확실성을 달가워하지 않을 사람들에게는 분명 이 게임의 주사위가 큰 단점으로 다가올 것이다.

-게임 종료 직후-

그리고 지금껏 말하지 않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이 게임 최고의 단점이 있다. 룰을 익히거나 설명하기가 정말 어렵다는 점이다. 분명히 게임 자체는 박스도 작고 아기자기하지만, 보드에 오밀조밀한 잔룰이 숨어있다. 회사의 주가 조정이나 인도의 경제, 정치, 사회 상황 등은 카드가 어떻게 배치되었는지로 파악해야 한다. 법안이 늘 수록 기억해야 할 잔룰도 많다. 그리고 나의 경우에는 룰북 자체도 좀 불친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게임을 진행하다보면 어느 정도 감이 오긴 하지만, 처음이 어렵다, 처음이.

4. 일신

몇년 전 이 게임의 인기에 힘입어 재판을 펀딩하였고, 당연스레 나도 펀딩에 참여하였다. 일러스트와 모호한 인도카드 등을 맵으로 일신하여 새롭게 단장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2년 즈음 지난 뒤 기대에 마지않던 재판이 배송되었다.

-2판 박스 전면부-

-토큰이 프린팅 되고-

-볼륨은 엄청나게 늘었다-

-1판 박스와의 크기 비교-

-2판 플레이 보드

(출처 : 레딧 https://www.reddit.com/r/soloboardgaming/comments/15lad4h/john_company_2nd_edition/)-

2022년 무렵 부푼 마음에 게임을 받고 룰북을 차근히 읽어보았다. 이거 맞아? 1판보다 커진 볼륨, 그리고 훨씬 어려워진 게임. 와, 보기만 해도 배 부르다. 근데 이거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은 있을까, 안될거야 아마.

5. 마무리

요즘은 이 게임을 어디서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도 전부 해외구매로 재고를 확보한 게임이라 해외 쇼핑몰 어디선가는 판매하고 있지는 않을까. 디자이너가 루트, 팍스 파미르, 맹세 등 약간 정치, 협잡 게임 좋아하는 티를 팍팍 내기 때문에, 태생부터 이러한 게임성은 타고 났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작가의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스릴 넘치는 회사 경영 시뮬레이터가 되리라 믿는다.

하지만 분명히 호불호가 갈릴만한 게임이라는 생각도 든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동인도회사라는 배에 모든 가문을 태우고 명운을 걸어야 하는가. 회사의 경영과 가문의 영광 사이 얇은 동앗줄을 쥐고, 각 가문 간에 서로 당기는 모양새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면 퍽 괴로운 경험이 될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로 이 게임은 뇌리에 박힐만한 꽤나 놀랄만한 경험과 스토리를 선사해줄 것이라 생각한다. 누군가는 마치 그 시대를 살다온 듯한 느낌조차 받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 사람은 그날의 벅찬 경험을 한아름 안고 집으로 향하지 않을까. 마치 첫플을 했던 나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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