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이머만 경험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시뮬레이션. "헤게모니" 리뷰

새벽에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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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3-15 오후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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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무상의료 복지를 발의하겠다구요? 세금은 조상님이 내주십니까! 아니, 여기가 북한이에요? 세금 올려서 기업이 망하면 다들 가난해집니다!”

“서민들 의료혜택과 교육을 못받아서 비정규직으로만 전전하는데, 의료라도 무상으로 제공해야 건강하게 기업을 위해 일할 것 아닙니까! 그래야 기업도 돈을 벌죠!”

마치, 매끈한 정장차림에 짙은 정당색 넥타이를 멘 정치인들이 시사토론프로그램에서 목청껏 나눴을 것 같은 대화같지만, 실제로는 보드게임방 아지트에서 후질근한 추리닝차림의 3040 아저씨들이 헤게모니를 즐기며 나눈 대화였다.

지금의 삶과 현실에 너무 가까워서 한없이 무거울 것 같은 주제를 ‘보드게임’이란 소재로 녹여낸 명작 헤게모니를 리뷰하고자 한다.

대한민국 제22대 총선이 한 달이 채 남지 않았다. 여러 이권들이 뒤섞이며 정책이 나오고 이전의 정책은 폐지된다. 연일 뉴스만 틀면 각계 거물급 정치인의 행보가 첫 번째 기사로 다뤄지며, 경선에 실패한 정치인들의 씁쓸한 퇴장과 신인정치인들의 발빠른 행보가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바야흐로 정치혐오의 시대에 살고 있다. 20대 투표율은 선거때마다 매번 최저치를 경신하고 있고, 지지하지 않는 정당에 대해서는 비난에 가까운 의견들이 커뮤니티마다 가득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란, 언제나 공기처럼 우리의 주변을 떠돌고 있으며, 개인의 삶을 새로운 기회의 장을 제공할 수도 있고, 치명적으로 작용하거나 심지어 사망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현재 의대생 증원문제로 시작된 의사 파업은 생명이 위독한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정치 소재는 문화예술장르로 다루기 어려우며, 다루더라도 해학적 요소를 가득 담아서 보다 가볍게 가져가려고 노력한다. 대표적으로 영화 스윙보트나 트로피코와 같은 게임들이 좋은 예시일 것이다.

보드게임으로도 정치를 다룬 소재들은 많다. 황혼의 투쟁이나, 시크릿히틀러도 정치소재를 다룬 게임에 속한다. 하지만 날 것 그대로의 ‘정치’를 만난다기 보다는 게임의 재료로 사용되는 정도일 뿐이다.

그러나 보드게임 헤게모니는 소재로서의 정치가 아니라 날 것 그대로, 당장 우리가 처한 지금의 현실을 게임으로 가져가 시뮬레이션하는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입법, 국가, 시민, 권리, 의무, 온갖 추상적인 개념들이 뒤섞여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낸다.

이는 마치 아바타의 문법과 비슷하다. 현실의 세계에서 하나의 시뮬레이션일 뿐이지만, 그 안의 세계는 수많은 정의와 이권들이 현실처럼 벌어진다. 이 시뮬레이션된 세계는 성공적인 공산주의 국가에 이상실현 일수도 있고, 심화된 자본주의 속에 도구화된 노동자의 국가가 만들어 질 수도 있다. 거대정부가 자유를 무참히 밟을수도 있으며, 작은 정부 하에 기업이 득세 할 수도 있다.

헤게모니는 이 시뮬레이션을 조금도 가볍게 가져가고자 하지 않았다. 긱웨이트 4.2점에 플레이어는 자본자, 노동자, 중산층, 정부 중 하나가 선택되며, 모든 진영은 개별 룰이 존재하고, 달성하려는 목표를 달리 한다. 이로써, 시뮬레이션은 성공적이지만 진입장벽은 상당히 높아진다. 애초에 가볍기를 포기했기에 이 정도의 웨이트를 감당할만한 보드게이머에게 즐길 기회가 주어지는것엔 아쉬움이 있다.

헤게모니는 게임의 여러 부분에서 소름돋는 디테일들을 보여준다. 정부의 정책방향은 덱에서 랜덤으로 등장하며 플레이어의 의지와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고전적인 보수성향의 정부는 노조와 대립을 했지만, 지금의 보수정부가 의사나 과학자와 같은 중산층과 대립하는것처럼 게임내에서 보수정부가 집권해도 이민정책을 내는 등 현대화된 복합적인 이해상충을 보여준다. 중산층은 이민정책으로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번영도가 낮아져 승리와 멀어지고, 기업과 노동자가 다투면 다툴수록 서로 턴을 소모해 하고자 하는 일을 못하게 된다. 카드에 쓰여진 텍스트뿐 하니라 게임시스템까지 현실을 거울처럼 비추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이 게임의 가장 강점은 분명 정치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감히 게이머를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헤게모니가 전달하는 거울속 세상은 노동자의 인권이 중요하다던지, 자본가에게 윤리의식을 강요한다던지 하는 계몽사상을 반영하지 않는다. 이러한 계몽사상은 정치소재의 문화예술장르가 지니는 태생적인 단점인데, 이를 영리하게 피하면서도 그저 거울의 역할로서 반영하고 플레이어를 자본가나 정부를 경험 할 ‘앉을 수 있는 의자’만 무던히 내밀고 있을 뿐이다.

<정치가 소재되는 컨텐츠는 태생적으로 계몽적 성격의 가진다.>

그래서 헤게모니는 누구와 즐기느냐에 따라 전혀다른 즐거움과 경험을 주게되며, 한편으로는 잘 맞지 않는 플레이어와 즐겼을 때 아주 불편한 게임으로 다가올수 있다. 게임에 놓여진 수많은 토큰들이 아주 복잡한 수싸움이 얽힌 유로게임인 것처럼 비추어 지지만, 실상은 협잡이 난무하는 파티게임에 가깝다.

노동자와 기업가가 손을잡고 정부 정책을 견제하기도 하며, 독주하는 중산층을 막기위해 적극적인 이민정책을 펼치기도 한다. 정부는 본인의 방향을 관철시키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세수를 줄이기도 하고, 중산층과 노동자가 손을 잡아 공기업을 대폭늘려 정부를 제정위기에 빠뜨릴수도 있다.

<게임 내에서 정부가 재정이 파탄나면 IMF의 구제가 시작되고 게임의 양상이 급변한다.>

눈부신 디지털 과학의 발전은 사실에 가까운 3D게임, VR게임을 만들어 내었다. 이런 게임들은 시각분야에서 현실 세상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묘사하는지 앞다투어 발전해 왔다. 그러나, 묘사하고자 하는 대상이 국가, 법률, 행복도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이라면 어떻게 보여주는 것이 리얼리티를 만족시킬 수 있는가에 해답을 헤게모니는 제시하고 있다. 펼쳐진 보드 위에 좌익과 우익이, 자본가와 노동자가 대립하며 생생한 생동감을 가지고 살아있음이 느껴진다.

<게임이 디지털로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지만, 분명 보드게임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함도 있다.>

수 많은 보드게임이 PC나 스마트폰으로 이식되고 있으며, 필자도 이번에 발매한 듄임페리움을 소장해서 플레이 하고 있다. 실제 보드게임의 현장감은 없지만 그런데로 즐기기엔 꽤 괜찮았다. 이미 한참 앞서가버린 디지털 게임시장으로부터 보드게임은 하위호환이나 마이너한 장르가 되어있다. 그러나 헤게모니가 제시하는 게임은, 보드게임으로 넷이 의자에 앉아 서로의 의견을 주고 받길 추천하며 디지털로 구현할 수 없는 아주 특별함을 제공하고 있다. 보드게임만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영리하게 활용하고 있다.

여느 비대칭게임들이 그러하듯 헤게모니도 특정 세력이 승리하기 위한 OP카드라던지, 전략들이 존재한다. 익숙해지면 이기기 쉬워지고 강한 전략을 사용했을 때 견제가 어려워지기도 한다. 한번은 정부가 우승을 하였으나, 잘못된 이민정책으로 실업자는 빼곡이 쌓여 있었고, 기업은 부채에 붕괴직전에 있었으며, 노동자는 제대로된 의료와 교육을 받질못해 번영도가 바닥이었다. 정치인들은 승리했지만, 나라는 파탄에 이르게 되어있었다. 그래서 플레이어의 결말과 게임의 결말은 서로 다른 결말을 제공하게 된다.

필자가 수년간 보드게임을 즐기면서,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을 준 게임이 몇 개 있는데, 헤게모니는 당연 그중에 가장 특별한 것으로 기억된다. 보드게임이라는 것을 취미로 즐길 수 있고, 4점대 웨이트를 소화해 낼 실력이 되다면 이 특별함을 꼭 경험해 보라 추천하고 싶다.

다만, 헤게모니가 펀딩으로 진행한 게임인데다, 많은 물량이 제공된 제품이 아니다보니 필자도 웃돈을 주고서 중고로 구매할 수 밖에 없었다. 보드엠에서 빠른 시간 내에 2쇄 제작을 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다.

오늘,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백반집을 갔다. 백반집 사장은 이내 된장을 맛있게 끓여 내오고 나서, TV조선 뉴스를 크게 틀어 놓고, 멍하니 시청하고 있었다. 한창 점심을 먹고 있던 중 다음 손님으로 40대쯤 되어 보이는 중년이 식장문을 들어오더니, TV에 틀어진 채널을 보고 인상을 지푸리며 자리에 앉지 않고 문을 다시 열고 나갔다. 사장은 인사를 대뜸 하였다가, 나가는 것을 보고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앉아서 뉴스를 보고 있었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정치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너무 무겁고, 또는 혐오스럽기도 하고, 때론 치명적일 수 있는 이 소재를 게임으로 즐겨볼 수 있는 이 특별함을 한번쯤 꼭 경험해 보라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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