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지만 좋아 - 르 아브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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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4-27 오후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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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아그리콜라와의 첫 만남

아그리콜라가 보드게임긱 순위 1위를 하던 시절, 당시 국내 판매처에서는 9만 9천원이었나? 보드게임 치고는 엄청 비싼 가격으로 한글판이 막 판매되고 있었다. 이 게임이 뭐길래 이렇게 인기가 많지? 그리고 왜 이리 비싸지? 대강 살펴보니 나무 컴포넌트가 왕창 들어있는 농장 경영게임이라는 사실을 알고 흥미가 생겼다. 아, 동물도 키우고, 밭도 만들면서 가족도 늘리는, 뭔가 아기자기한 타이쿤류 게임이구나.

그러던 중 우연찮게 아그리콜라를 플레이 하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하려고 보니 꽤 까마득했다. 카드를 받고 자기 농장을 지으라는데 내겐 딱히 밑천도 없었다. 허허벌판에 놓인 듯 막막한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출발선에서 땅 소리가 들리자마자 달려나가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리고 우왕좌왕 주위를 둘러보는 내 모습이 한심했다. 당장 밥 한끼 건사하기도 어려운 순간들, 남들 따라 무작정 내놓은 자식들은 허기에 칭얼대는 듯 했다. 애써 키운 양도 잡고 소도 잡아다 매 끼니를 떼우기 바빴다. 라운드가 지난 후 승점을 계산할 때가 되니, 소는 몇점이고 양은 몇점, 밭은 몇 점, 집은... 아, 내가 지나온 모든 길을 승점으로 매기다니, 잔인해라. 마치 발가벗겨진 나의 궤적을 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고생 깊었던 아그리콜라와의 첫 추억이 끝났다.

(아그리콜라의 넓디 넓은 보드 (출처 : https://boardgamegeek.com/image/259546/agricola))

아그리콜라는 내게 좋은 기억이 별로 없는 게임이다. 이후에도 몇 번 즐겨 보았지만, 빡빡한 일꾼놓기의 허들을 넘기는 참 어려웠다. 게다가 이걸 하면 저것이 손해고, 무엇이 덜 손해인지 계산도 해야하는 것도 유난히 힘들었다. 다른 게임도 마찬가지일 텐데, 왜 이 게임은 괴로운걸까. 어떻게든 점수를 쥐어짜기 위해 발악하는 나의 모습. 게다가 내가 하려는 일은 남들도 하고 싶어하는 일이다 보니, 경쟁을 하려면 턴을 매우 정교하게 설계해야 했다. 정말 고단한 삶을 옮겨놓은 듯한 게임. 예전에 이 게임을 설명하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마치 나 혼자 집에서 가구 배치를 싹 다시 하는 게임 같다고. 귀찮음을 싫어하는 내게 그런 작업은 즐거운 일이 아니다. 게임을 시작 할 때 마다 앞으로의 숙제가 산더미같이 쌓이는 것 같다.

하지만 게임을 즐기는 많은 사람들은 그 빡빡함 속에서도 계획대로 만든 설비가 정확히 돌아가는 것을 보며 쾌감을 느끼는 듯 했다. 태생부터 찐 P인 나는 계획이라는 게 없는데. 그냥 그때그때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양도 키우고, 울타리도 대충 지으면 안되나 싶었다. 물론 그렇게 해도 된다. 그 게임, 분명 꼴찌는 하겠지만.

0-2. Don't Starve Uwe

그 중에 나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더러 있었나보다. 한 것도 없는데 밥 먹으래! 먼저 가족이 늘어나면 너무 유리한 거 아뇨? 등등의 성토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그런지 이후 다른 디자이너들의 게임에서는 일꾼놓기에 변주를 주고자 하는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마치 이 액션은 아무나 못합니다~ 라고 선전하듯, 액션에 드는 비용이 많거나, 액션에 필요한 일꾼이 많이 들거나, 혹은 특정한 일꾼만 그 액션을 수행할 수 있거나. 마치 다른 게임들은 일꾼을 많이 거느리는 것 만이 능사는 아니라구요~ 라고 말하는 것 처럼.

(비교적 최근 출시된 문명의 시대. 문명에 따라 주어지는 각기 다른 일꾼으로 몇명을 어떻게 배치하는지가 승부의 관건이다. (출처 : https://boardgamegeek.com/image/5292955/age-of-civilization))

게임 디자이너인 우베 아저씨도 그 피드백을 받아들인 듯, '이번 게임은 밥 먹이기가 더욱 쉬워졌습니다.' 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달고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카베르나와 아를의 평원으로 이어질 수록 밥 먹이기나 일꾼 운용의 압박이 줄어든 것은 확실했다. 다만 쉽게 밥을 먹일 수 있다는 것이지, 밥을 먹는 기회비용까지 줄인 건 아니었다. 일단 밥을 먹이려면 다른 행동에 제약이 있으니, 뭘 해도 밥 먹이기는 참 까다로웠다.

(아를의 평원의 진보된 개인보드, 그리고 진보된 밥 먹이기까지.)

내가 우베 아저씨의 생각까지는 읽지 못한다. 하지만 매 라운드마다 자원을 깎아먹는 밥먹이기의 압박이 트레이드마크가 된 것을 보면, 분명히 그 매커니즘을 넣어야 할만한 이유가 있었지 않을까 짐작한다.

아무리 아그리콜라의 밥먹이기가 까다롭다지만, 돌아보면 일꾼의 효용에 비해 밥값은 상당히 저렴한 편이었다. 그래서 모두는 밥을 덜 만들기 위해 일꾼을 덜 만드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보는 편이 옳겠다. 만일 아그리콜라가 밥 먹이기 없이 오직 자원의 판매만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게임이었다면 어땠을까? 많은 일꾼을 선점한 사람의 점수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다.

밥 먹이기라는 매커니즘은 일꾼 유지비용이라 보아도 좋다. 실제로 새로운 일꾼을 고용하는 데 드는 초기비용이나 턴의 소모 또한 꽤 있는 편이다. 그럼에도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앞서 말했듯 가뜩이나 빡빡한 턴의 압박 속에서, 내가 다른 사람보다 액션 하나를 더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이득인지를. 돌아보면 이를 밥먹이기라는 현실적 요소에 융화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다른 자원과 더불어 일꾼 유지 이외에는 필요없는 밥이라는 자원을 더 생산해야 한다니.

(일꾼 유지비용이 임금의 형태로 적나라하게 표현된 게임, 그라운드 플로어.)

플레이어는 두가지 자원을 놓고 기회비용을 계산한다. 승점과 직결되는 자원과, 승점에 필요없지만 게임을 진행하는 데 필요한 자원. 당장 굶어도 승점을 모아볼래? 아니면 넉넉하게 먹거리 장만 먼저 할래? 자원과 승점 구도는 굳이 우베 게임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존재해 왔다. 그렇다면 왜 유독 우베 게임에는 괴로운 트라우마가 생겼는가. 해야 할 일은 많고 할 수 있는 일은 적다는, 활동의 다양성과 제약이라는 틀이 플레이어를 옭아매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고 그 빡빡함이 게임을 한 번 더 라고 외치도록 만드는 동력은 아니었을까.

1. 항구 밖에서 낭만을 바라보다

그런 와중에 즐기게 된 르 아브르는 좀 독특했다. 분명 이 게임 또한 매 라운드 밥먹이기의 압박은 있다. 그런데 일꾼의 수량으로 인한 패널티는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다 각자 하나씩 공평하게. 그리고 건물 선점으로 인한 이득도 확실히 덜한 느낌이다. 조금의 비용만 지불한다면 남이 이미 지은 건물이라 하더라도 이용할 수 있었다. 오오, 이거 아그리콜라와는 결이 다른데?

(르아브르 박스 표지(출처 : https://boardgamegeek.com/image/447994/le-havre))

보드 또한 항구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뱃길과 항만이 간략히 그려져 있었다. 배가 지나다니는 칸은 딱 7개. 그리고 카드를 놓는 곳, 자원을 놓는 곳이 심플하게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웅장하게 느껴졌던 박스와 달리 컴포넌트도 상당히 심플했다. 좀 직설적으로 말하면 앙상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좋겠다. 전작이었던 아그리콜라와 비교하면 수많은 나무 컴포넌트와 개인보드, 기타 카드는 대신 박스 그림 안에 그려진 자원토큰과 카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우베 게임이라고 기가 눌릴 필요 없다. 다른 게임들과 달리 엄청난 잔룰도 없고, 카드의 쓰임은 심플해졌다. 대개 이용할 수 있는 일반 건물카드는 정해져 있어서 대략 어떤 카드가 나올지도 알 수 있었다. 이 게임에서 리플레이성을 확보하기 위한 요소란 턴마다 쌓이는 자원의 순서, 일반건물카드의 순서, 그리고 무작위로 출현하는 특별건물 요 세개가 전부였다. 그래서 적절한 행동을 가늠하는 것도 가능하다.

(메인보드가 깔끔하게 디자인 되어 있다. (출처 : https://boardgamegeek.com/image/375959/le-havre))

그리하여 이 게임의 엄청난 장점이 생겼다. 룰을 설명하기가 아주 쉬워졌다는 것이다. 너는 자원을 먹거나 일꾼을 원하는 건물에 배치해서 그 행동을 수행하면 된다는 아주 짧고 단순한 설명만 있으면 된다. 서로 카드를 쥐며 이게 무슨 뜻인지 골똘히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아이콘으로 친절히 설명되어있고, 난해한 건 그때그때 무슨 뜻이라고 친절히 알려줄 수도 있다. 그렇다. 이 게임에 비공개는 하나도 없다. 비공개란 오로지 플레이어의 생각 뿐.

2. 조삼모사

이렇게 쉬운 게임이라... 쉬운 게임? 설명과 달리 막상 게임을 시작해보면 모든 건 눈속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시작자원은 돈 몇푼과 석탄 한줌이 전부. 게다가 7턴이 지나면 한 라운드가 끝나는데, 한 라운드에 모든 플레이어가 액션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배가 7칸을 지날 동안 플레이어끼리 번갈아가며 한 턴씩 플레이하게 된다.

소주가 7잔 나오는 이유는 누군가가 넘치거나 모자라기 때문이라 했던가. 1인플을 제외하면 이 게임에서 지원하는 2~5인플 모두 누군가는 한 번 더 턴을 갖거나, 덜 갖게 된다. 물론 모든 라운드를 거치면 다들 같은 턴을 갖게 되긴 하지만, 결정적인 라운드에 모자란 턴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일례로 5인플일 경우 3명은 해당 라운드에 딱 한 턴만 치르고 밥을 먹여야 하는 것이다.

그뿐일까? 밥 이야기가 나왔으니 더 얹어보자. 매 라운드가 끝날 때마다 지불해야 할 유지비용인 식대는 점점 늘어난다. 이 게임 또한 밥을 만들기 위해서는 생선을 제외한 모든 자원을 가공해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밥을 위해 자원을 얻고 가공하는 턴을 소모해야 한다는 이야기. 하지만 한 턴이 매우 소중하다보니 자원을 모아서 한번에 밥으로 바꾸어야 할 것 같은 압박이 끊임없이 들어온다. 게다가 내가 모은 자원을 다른 사람도 모았다면, 건물을 확보하는 눈치싸움 또한 필수이다.

(라운드 끝에 저 표시를 보면 숨이 턱 막힌다. (출처 : https://boardgamegeek.com/image/380678/le-havre))

그래서 이 게임은 자동으로 밥을 공급해주는 선박이 무척이나 중요한 시설이 될 수 밖에 없다. 어? 그런데 조선소는 1개에서 2개 뿐이다. 그 말은 조선소에 들어가기 위한 눈치싸움 또한 필연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아그리콜라의 가족 늘리기가 배 늘리기로 바뀌었을 뿐, 달라진 건 별로 없다. 밥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액션을 줄인다는 게, 밥을 만드는 액션을 더해주는 일꾼 하나를 늘린다는 말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이거, 조삼모사 아니야? 아이고.

건물을 건설하기 위한 자원도 조금 더 정교해졌다. 갈대, 돌 처럼 그저 가져오는 게 아니라 벽돌이나 강철처럼 가공을 해야 생산할 수 있는 것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특히 강철을 생산하려면 여러 공정을 거쳐야 한다. 먼저 철을 얻고, 웬만하면 석탄을 얻은 후에 석탄을 코크스로 가공해야 한다. 그리고 코크스에서 생산되는 에너지를 토대로 철을 강철로 제련해야 한다. 이 과정만 해도 벌써 4번의 턴이 필요하다. 그렇게 생산한 강철을 건설에 사용하거나 판매하기 때문에 자원의 이용까지 총 5번의 턴을 소비해야 하는 것이다.

(자원의 다양성 (출처 : https://boardgamegeek.com/image/375965/le-havre))

게다가 솔로플레이가 아닌 다인플일 경우, 다른 사람의 일꾼이 특정 지역을 선점하고 있다면, 내 일꾼은 들어가지 못한다는 치명적 견제 때문에 게임의 빡빡함은 배가 된다. 와, 이렇게 숨이 턱 막히는데 어떻게 발전하지?

그런데, 그게 절묘하게 된다.

3. 그럼에도 항구는 돌아간다

(항구를 발전시키기 위한 여정)

숨 막힐 정도로 빡빡한 구성의 게임이지만, 플레이어의 숨통을 열어준 요소도 분명히 있다. 먼저 대출이 빡빡하지 않다. 아그리콜라의 구걸은 받는 순간 꼴찌라고 할 만큼 치명적인 실패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이 게임은 대출심사가 널널한건지, 당장 내야 할 돈이 없다면 큰 제약 조건 없이 대출을 받을 수 있다. 4원 받고 5원으로 갚기, 게다가 이자는 무조건 1원. 다른 게임과는 달리 대출을 적극 권장하는 느낌을 받는다.

(플레이어의 배가 이자 칸에 도달하면 이자를 내야한다. 다만 이자의 조건이 까다롭지 않아 다행이다. (출처 : https://boardgamegeek.com/image/440453/le-havre))

게다가 이 게임에서 모든 식량은 돈으로 대체된다. 5개의 식량이 필요하다면 5원을 내도 상관 없다. 1개의 식량자원이 필요할 때 3의 식량 가치를 가진 스테이크와 1원이 있을 경우, 쿨하게 1원으로 대체할 수도 있다. 그래서 무작정 식량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열을 올리기 보다 돈과 식량을 잘 조합하는 방법을 연구하면 길이 보일지도 모른다. 부족하다면? 대출이 있잖아.

그에 더해 이 게임, 승리 조건 또한 돈이다. 아그리콜라나 다른 게임처럼 뭐 하면 몇점, 몇점을 따로 매기는 것이 아니라 내 모든 가치는 돈으로 환산된다. 그게 그거 아닌가 라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도 발전해야 하는 타 게임과 달리, 이 게임은 오로지 금전일변도이다. 물론 자원을 생산하는 데 이것 저것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최종 목적이 아니라, 오로지 돈을 버는 수단으로써 기능하기 때문에, 나는 그저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한 방법만 생각하면 된다. 승점 고려와도 다른 것이, 돈은 게임의 과정에서도 쓰일 수 있기 때문에 조금 더 마음의 짐을 덜고 게임을 플레이 할 수 있다.

일례로 건물은 건설과 구입을 병행할 수 있다. 건설은 건설계획 칸에 있는 건물카드에 자원을 소비하고 내 건물로 가져올 수 있지만, 해당 가치의 돈을 지불하면 건물을 구매할 수도 있다. 그 가치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게임 종료 후 온전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에, 자금의 여유가 된다면 잽싸게 사두는 것도 꽤 큰 도움이 된다.

(플레이어의 밥줄, 선박. 구입 가격과 가치가 다른 대표적인 카드이기도 하다. (출처 : https://boardgamegeek.com/image/380330/le-havre))

4. 맛있게 맵다

위와 같은 요소들이 한 데 버무려진 게임. 역시나 할 일은 많은데,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인 기묘한 게임이 다시 완성되었다. 그런데 이 게임은 특이하다. 내가 그렇게 하기 싫어했던 아그리콜라와 비슷한 맛이 분명하다. 그런데 우베 게임과 나는 안맞다 라고 느꼈던 어느 지점을 교묘하게 빗겨간 느낌이 든다.

맛있게 맵다. 작가 특유의 막막한 요소를 조금은 피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상하다. 시작할 때 이걸 어떻게 하나 싶은데, 그게 또 하다보면 된다. 신기하다. 그건 아그리콜라도 마찬가지일텐데 왜 이 게임은 막막함이 덜 할까. 액션이 단조로워서? 건물이 늘어날 수록 할 수 있는 액션의 폭이 넓어진다는 구성 자체는 아그리콜라와 다를 것이 없는데.

아그리콜라를 이사나 대청소를 치르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라 한다면, 르 아브르는 등산에 비유 할 수 있었다. 저 정상에 언제 올라가 싶다가도 반쯤 올라가 있고, 어느 새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느낌. 내가 이걸 다 지었어? 내가 이 돈을 번 게 맞나 싶을 정도의 성취감을 얻는다.

또한 게임을 즐기며 느껴지는 발전과 생산의 하모니도 빼놓을 수 없다. 정말로 자원을 수집하고 가공하고 출하하는 느낌이 든다. 그러한 느낌은 다양한 건물의 기능도 한몫 하는 것 같다. 일반건물 이외에도 특별건물이 매번 새롭게 등장하여 기상천외한 액션으로 채워지면, 이번에는 이런 걸 해봐야겠다며 새로이 머리를 굴리게 된다.

5. 그래도 매운 건 매운 거지

그렇다고 이 게임에 호불호가 없는 건 아니다. 특별건물도 즐기다보면 새로움에 한계가 있듯 한글판으로 컴플리트 에디션이 출시되었지만, 확장 건물은 설명도 난잡하고 뭔가 복잡하게 꼬여있는 느낌이 든다. 진짜 특별하다는 느낌? 기존의 특별건물은 단순히 아이콘으로 표기할 수 있을 정도였다면, 확장은 뭔가 글이 빼곡히 써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게 정말 특별한 능력으로 받아들여지는, 새로운 방식의 게임을 만들 수 있겠다는 느낌이라면 괜찮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냥 일반판으로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토큰을 비롯한 컴포넌트가 요즘 게임에 비해서 조악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풍성한데 그렇지 않은 듯한 느낌. 물론 가격대나 이런저런 요소를 비교해보면 컴포넌트가 그리 빈약하지는 않다. 하지만 나무 컴포넌트 가득한 다른 제품들과 달리 워게임 마커로 쓸법한 르 아브르의 조그만 토큰을 보고 있자면, 뭔가 좀 아쉽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나마 기도하고 일하라에서는 그 컴포넌트의 보강이 이루어져서 참 괜찮다 싶었지만, 아무래도 게임 출시일이 출시일이라 그런가, 조금은 아쉽다. 그 자그마한 토큰을 뒤집는 것 말고는 가공을 표시할만한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 그래, 모든 자원을 나무 컴포넌트로 대체하기에는 자원의 종류가 너무 많다. 그 부분은 어쩔 수 없이 넘어가자.

(자원이 작고 아기자기하다. 정리는 나중에 하자, 일단 즐길 뿐.)

한편 이 게임은 다른 우베게임들처럼 1인플을 지원한다. 그런데 그 1인플 모드라는 것이 게임에 오토마를 넣거나 그런 게 아니다. 카드와 라운드의 조절만 있을 뿐 기존과 세팅의 변함이 거의 없이 내가 할만큼 최선을 다해서 최종승점을 매기는 것이다. 어찌보면 이 1인플 모드는 단순하면서도 게임이 가진 본연의 느낌을 크게 해치지 않는다. 그렇기에 혼자 앉아서 1인플을 하고 있으면, 나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착착 게임을 진행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내가 느낀 이 게임의 아쉬운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1인플이 게임 본연의 재미를 흐뜨러트리지 않는다는 말은 다인플이 가진 느낌과 비슷하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그 말인 즉, 게임의 설계가 잘 되었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다인플을 할 때의 감상 또한 1인플을 할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는 말과도 닮아있다. 누군가는 일꾼으로 인한 견제나 자원 견제가 핵심인 이 게임에서 어떻게 1인플과 동일한 재미를 논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정갈하게 놓고 1인플 한 판)

물론 이 게임이 인터렉션이 없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굳이 따지면 일꾼과 건물 견제 이외에 다른 눈치싸움이나 예상치 못한 수가 느껴지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정말 빡고수끼리 플레이하면 기계처럼 굴러갈 것만 같은 느낌. 건조한 전략게임처럼 별 말 없이 할 것만 하면 되는, 딱 그런 느낌이었다. 인터렉션으로 인한 무궁무진한 변화보다는 합리성으로 무장한 개인 간의 투쟁이라 표현하는 게 좋을까?

음, 이 게임에서 살며시 나는 벽게임의 옅은 향기가 나의 거부반응을 이끌어내는지도 모른다. 쓰고 보니 참, 불만도 많다.

사실 이 이야기는 내가 생각했을때의 최근 게임 동향과 벽게임, 그리고 나의 견해와도 맞물린 이야기인데, 너무 길어질 것만 같다. 그냥 인터렉션이 강한 게임들을 선호하는 나의 입장에서 볼 때, 일꾼놓기 등의 간접적인 견제와 내 보드게임의 성향이 안맞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 해서 이 게임이 5인 풀파티를 꾸려서 돌리면 즐거울 게임이냐? 또 그렇지도 않다. 이 게임은 1명이 플레이 할 동안 나머지 4명은 멀뚱히 구경해야 하는 다운타임이 상당히 긴 편에 속한다. 게다가 이 게임은 인원이 많아질수록 플레이타임도 길어지는 전형적인 +(플러스 인원)게임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게임의 최적 인원이 3인이라 말한다. 그래서 한 때 3인은 르 아브르, 쓰루 디 에이지스, 와이어트 어프 등이 공식처럼 떠돌기도 했었다.

늘어지는 시간은 딱 3인까지 참아줄 수 있다. 2인도 괜찮지만 그래도 좀 심심하고, 3인은 돼야지. 이런 3인 전용 게임 딱지는 이 게임을 오래 살아남게 하는 전략이기도 하지만, 4인 이상은 꺼낼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하는 마력의 수식이기도 하다. 보드게임을 하려고 모였다면 대개 4인이 최적일테니, 르 아브르는 애초에 플레이 대상으로 고려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 뭔가 아쉽다. 4인 이상일 때 사용할 수 있는 카드가 거의 만져지지도 못하는 현실이 애석하다.

(아트센터 카드. 이 카드를 게임에서 만날 일이 있을까? (출처 : https://boardgamegeek.com/image/375974/le-havre))

일전에 르 아브르 5인플을 딱 한 번 해본 적이 있다. 솔직히 말하면 사람들이 질색하는 원인을 알 것 같기도 했지만, 그렇게 못해줄 정도는 아니었다. 나름 괜찮았다. 그런데 다른 더 좋은 게임이 있다면 굳이 이 게임을 해야하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굳이 총 평이라면 그냥 쏘쏘한 게임 정도? 물론 이 게임 5인플 하는 것보다 별로인 게임들만 있다면 어쩔 수 없지만.

6. 그래도 네가 좋다

한때 르 아브르는 절대 한글판 재판이 되지 않을거라 낙담하던 시절도 있었다. 판매량이 저조했다는 소문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보드의 미스프린트로 붙여야 했던 수정스티커가 꺼림직해서 쉽사리 구매에 손이 가지 않았다. 그때는 그런 보드수정이 흔치 않아서 그렇게 거슬릴 수가 없었다. 물론 지금은 컴플리트 에디션을 냅다 구하게 되었지만.

이제는 고전게임의 반열에 들어갈 법한 연식. 누군가는 이 게임에서 클래식, 아니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구식의 향을 맡을 수도 있겠다. 요즘 게임에 비해 좀 단조로운 것 같은데? 물론 찬란하게 빛나는 요즘 게임에 비해 심심한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나는 이런 게임을 종종 콩나물국에 비유하곤 한다. 매번 찾지는 않지만, 가끔씩 담백한 게 땡길 때 찾을만한 게임. 그때마다 책장에 고이 꽂혀있는 르 아브르에 눈이 간다.

아그리콜라가 십몇주년 기념판이 나오는 상황에서, 왜 르 아브르는 그런 게 없을까 싶기도 하다. 이 또한 아쉽다. 하긴, 이 게임을 업그레이드 해서 출시하려면 자원 컴포넌트를 바꾸거나, 게임에 더 괜찮은 요소를 넣거나, 좀 더 멋지게 꾸며야 할 텐데. 안 될거야, 아마.

원하는 듯, 원하지 않는 듯. 호평과 혹평을 오가는 호불호의 핑퐁 속에서, 몇 마디는 꼭 해야겠다. 이미 다 까발려진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 통칭 우베 게임은 불호에 가깝다. 하지만 르 아브르 만큼은 좋아한다. 아마 내가 남긴 여러 후기글을 뒤져보면 일꾼놓기 게임에 대한 불호를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르 아브르는 책장 한 켠에 고스란히 살아남았다.

(의외로 둘이 앉아, 가볍게 즐기기도 괜찮은 게임)

그렇다면 내가 이 게임을 남겨둘 정도로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게임의 장점이 단점을 덮어버릴 정도로 좋았기 때문이다. 룰도 깔끔하고, 자원 수급과 가공, 건물의 건설과 구매 등에서 정말 항만 산업을 일으키는 듯한 느낌이 난다. 그런데 이런 요소는 아그리콜라나 기도일, 카베르나 등에서도 느껴지지 않나? 그래서 나도 모르겠다. 왜 이 게임만 유독 좋아하는지. 단지 농촌에서 농사일 짓는 테마와 항만에서 건설역군이 되는 테마의 차이 때문인가? 아니면 속속들이 승점을 매기며 수우미양가를 매기는 시스템과 단순히 금전 보유량의 결과만으로 승패를 판가름 할 수 있는 시스템의 차이 때문일까?

분명 퍽퍽한 밥먹이기와 부족한 턴을 질색한다지 않았나? 근데 아무리봐도 이 게임에는 아그리콜라나 다른 게임만큼의 질퍽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정말 게임이 깔끔하게 떨어져서 그런걸까? 우베의 밥 먹이기에 질려하면서도, 일꾼놓기를 선호하지 않으면서도 이 게임을 좋아하는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

이 모순적인 마음을 파고들려 하지 말자. 사실 따지고보면 그저 게임의 첫 인상이 좋아서 일 수도 있다. 아니면 다른 우베게임을 처음 접했을 때의 지독한 기억과 르아브르의 괜찮았던 기억이 대비되어 그렇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냥 모두 제치고 색감이 마음에 들었을 수도 있다. 사실 수 시간 동안 고민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왜 그런지. 근데 내 마음이 이 게임은 좋고, 저 게임은 별로라는데 낸들 어떡하나. 이렇듯 모순으로 점철된 나의 보드게임 라이프를 곱씹어 본다. 그래. 그럼에도, 나는 이 게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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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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