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뻘글)1인플 예찬론

쫌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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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4 오전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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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와 주관이 가득한 뻘글입니다. 보드게임에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가장 큰 제약은 게임 자체보단, 시간과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내와 지인들과 주로 게임을 하는데 대학시절부터 보드게임방에 다녔다는 게이머 성향이 나름 있는 아내와는 헤비한 게임도 줄곧 돌리곤 하지만 육아도 함께 병행해야하기 때문에 최근엔 시간이 잘 나지 않았습니다. 지인들도 대다수가 보드게임이라곤 부르마블이나 윷놀이 밖에 모르는 정도라 게임을 구입할 땐 언젠가 영업을 성공해 돌릴 수 있을 거란 망상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결국 돌리는 건 라스베가스나 슬루스, 러브레터 등등의 간단한 카드게임류만 돌리다보면 술에 이빠이 취해서 파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에 숙지한 룰을 상기시킬 겸 1인플을 짬짬이 즐겨보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았습니다. 퇴근 후 아내와 아기를 재운 후 내일 출근 준비도 끝내고 즐기는 꿀 같은 하루의 1인플은 삶의 원동력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 전까진 플스를 즐겼었는데 이놈은 조금만 재밌어지려고 하면 2시 3시를 넘어가기 때문에 다음날 눈두덩이 뜨뜻한 것이 뻘거무리해져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었습니다.(하지만 너무 행복했습니다. 즐거웠습니다. 번지... 데스티니...) 그런데 보드게임은 1인플 해봤자 헤비한 게임들도 1시간~2시간 안에 끝나기 때문에 적당히 갈증을 채워주고 눈깔 빨게 지는 일이 없어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여태껏 삶의 전부였던 플프로와 생애 처음 미국에서 직구한 장비들을 전부 동생에게 줘버리고 보드게임을 탐닉했습니다. 지인들이 놀러오면 다인플을, 아내가 기력이 충만하면 2인플을, 그것도 아니라면 1인플을 즐겼는데 최근엔 가면 갈수록 1인플 비중이 늘어나는 것 같아 한편으론 슬프기도 합니다. 1인플로 게임을 즐긴다는 건, 한편으론 명작 영화의 결말을 보지 못하고 끝맺는 기분이기도 하고 쐬주 없이 회를 한 젓가리 하는 그런 기분이기도 합니다. 100%를 만끽하지 못하고 50%~60% 밖에 느끼지 못한다는 감질 맛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1인플은 그 나름의 매력이 있습니다. 저는 그 매력이 연초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일이년전 담배를 끊었지만 그전까진 나름? 애연가였던 것 같습니다. 담배도 주로 디스플러스나 타임라이트를 태웠는데, 말보로의 구수한 향 보다, 마쎄나 던힐의 고급진 담백함 보다 담배 그 자체가 주는 덜 정제된 약간의 틉틉한 종이 맛과 쉬어 터진 메리야스 같은 영감쟁이 냄새가 주는 맛이 더 저에게 맞았던 것 같습니다. 뭔가 고된 노동이나 깊은 고뇌를 두세 시간 한 뒤 피는, 필터 끝까지 깊게 빨아들이는 돛대의 이미지는 외제담배보다 싸구려 담배들이 더 멋진 분위기를 자아낸다고 생각했습니다. 1인플도 그런 느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처량해 보일 정도로 보잘 것 없는 듯 보이지만 남들 시선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의 시간을 보내며 번뇌를 소거한다는 점에서, 남들과의 상호작용도 보드게임의 즐거움이지만 조금 더 원초적인 시스템적인 재미를 오롯이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필터 끝까지 빨아도 보고 뻐끔뻐끔도 해보고 사타구니까지 깊숙히 들이켰다 내벹어도 보는 것처럼 다양한 전략과 경우의 수를 남들 눈치 보지 않고 혼자 완급조절하며 묘미를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스돕 은둔 고수인 할매들이 홀로 짝 맞추기를 하는 것과 유사하게 보드게임의 일정 경지(?)에 이른 이들만이 맛 볼 수 있는 유희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10대 청춘 시절에 친구들과 우스갯소리로 농담 삼아 자주 ‘인생은 독고다이’라는 말을 하고 다녔는데 그 땐 뭣도 모르면서 희희덕대며 내뱉은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도 개뿔 모르지만 이제는 뭔가 어렴풋이 그 말의 뜻을 알 듯 말 듯 한 것 같습니다. 카미카제 특공대에서 비롯된 일제 강점기의 가슴 아픈 역사가 있어 써서는 안 될 말이지만, 촌에서 나고 자라 익히 들었던 저에겐 고독을 이처럼 깊게 표현할 수 있는 대체어가 없는 것 같습니다. 특공대처럼 홀로 왔다가 외로이 가는 인생, 때론 혼자서 유유히 보드게임을 즐겨보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습니다. '귤중지락'이란 말이 있습니다. 옛날 중국에서 한 사람이 귤을 까보니 그 속에 머리 허연 할배 둘이 바둑을 두었다는 데서 유래한 말인데, 바둑의 즐거움을 칭하기도 하지만 귤처럼 좁은 공간(테이블)에서 즐기는 낙을 일컫는 말이라고도 합니다. 좁은 공간은 자고로 넷 보다, 셋 보다, 둘 보다 혼자서 사색에 빠지기 좋은 곳입니다. 사색 보다 또한 보드게임에 몰입하기 좋은 곳이라고도 생각합니다. 강태공도 홀로 낚시를 즐겼고 위진남북조 시기 죽림 칠현처럼 역사 속 많은 은둔 현자들도 홀로 글짓기나 음악을 즐겼다고들 합니다. 현재와 같은 상황이라면 필시 이런 위인들은 매나 솔플을 수차례 클리어해 썪은 물이 되었을 것이며 정령섬, 아그리콜라 등 각종 유로 게임이나 테마 게임들을 집안 곳곳에 쌓아놓고 1인플을 즐겼을 거라 확신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피로와 스트레스를 받다 보면 때론 인간들과 멀리하고픈 마음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무념무상으로 연초 한 대 무는 것처럼 오롯이 자기 자신과 대면하고 고민하며 생각할 수 있는 1인플이 하루의 번뇌를 털어내는 좋은 의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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